(6)광해 왕...첫 기착지 행원포구에 내려 4년 유배 생활 뒤 생 마감
올레 18코스에 적소 터 등...특별성 비해 자취 초라해
“여기가… 어디인고?”
“… …”
“답답하구나. 여기가 어디더냐?”
“예~ 제주 땅 어등포라 하옵니다.”
“뭣이라? 제주?”
청천벽력이었다. 호송 책임자인 별장(別將)이 옆에서 뭐라고 설명을 하는 듯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은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망연자실한 왕은 혼자 뇌까린다.
열 몇 시간 여 험난한 뱃길, 속이 완전히 뒤집어지며 죽는 줄 알았다. 강화 교동도를 출발할 때만 해도 전에 갔던 태안으로 다시 보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길어지는 걸로 보아 멀리, 아주 멀리 남해의 어디 자그마한 섬으로 보내지는가 싶어 깊이 절망했다. 남해는 아득히 멀다. 한양에서 멀어질수록 왕좌 복귀의 꿈도 멀어지는 것이다.
머리엔 두건을 씌웠고, 주변에 휘장까지 쳤으니 배에 탄 동안 왕의 눈에 들어온 바깥 풍경은 일절 없었다. 이번의 이배(移配)는 단단히 비밀에 붙여진 모양이라 생각하며 드디어 도착해 내린 곳, 말로만 들어왔던 그 제주라는 것이다.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혼자 읊조린 말이었는데 마중 나와 엎드려 있는 제주목사는 쓸데없는 대답을 뱉아낸다.
“임금이 덕으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구중궁궐이 적(敵)들 소굴이 된다는 사기(史記)의 옛말을 모르셨는지요.”
비수와 같았다.
왕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나온 세월들이 가슴을 치는 회한으로 스쳐 지난다. 부친인 선조 임금의 견제와 미움을 받긴 했지만 기어코 왕의 자리에 오를 때만 해도 만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리라 순결한 열정으로 충만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친형인 임해군의 죽음, 이복동생 정원군과 조카의 죽음, 거기에 고작 8살이던 이복동생 영창대군의 죽음이 스쳐간다.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의 원한, 원수를 죽여 그의 목살을 씹어 먹겠다고 저주했다는 대비의 섬뜩한 눈빛이 왕을 노려보는 듯했다. 그리곤 운명의 그날, 사방에서 들려오던 무서운 함성들….
세 번째 유배지인 제주에서의 첫 밤을 보낼 숙소로 향하는 말 위에서 광해임금은 몸을 떨었다. 강화도 유배지에서 땅굴을 파고 탈출하다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폐세자 아들이 등 뒤에 바싹 붙어 업힌 느낌이다. 목매달아 자결한 며늘아이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과 며느리의 죽음에 시름시름 않다가 속절없이 눈을 감은 아내 유씨 생각에 말 위의 왕은 다시금 눈물을 쏟았다.
사랑하는 이들 모두를 떠나보낸 뒤 혼자만 남아 질긴 목숨을 이어왔다. 어느덧 15년째이다. 언젠가 다시 복귀하여 기필코 원수를 갚으리라는 한줄기 기대와 희망이 있었기에 버텨온 세월이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게 끝난 듯하다. 왕은 쓸쓸히 뇌까린다.
‘나 이제 살아서 이 섬을 벗어나진 못하리라, 환갑 넘은 나이에 천형의 땅까지 흘러왔으니….’
올레 20코스 한가운데쯤에 광해임금이 제주에 첫발을 디뎠다는 행원리 행원포구가 위치한다. 여행객들로 붐비던 월정리 카페거리를 막 지난 다음이라 포구는 한결 더 적막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광해 임금의 유배, 첫 기착지’라고 쓰여진 표지석 글들을 읽으며 잠시 서 있노라면, 한때는 조선의 군왕이었던 60대 노인이 400여 년 전 이곳에 내렸을 당시의 당혹과 회한의 심경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제주에 내린 광해군은 4년 뒤 6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배생활 19년 만이다. 세자였던 아들 질(李侄)은 26세에 사약을 받아 죽었고, 세자빈이었던 며느리도 남편 소식에 목매달아 죽었다. 아내인 폐비 유씨 또한 아들과 며느리의 죽음이라는 충격 앞에서 눈도 못 감은 채 죽었다. 이 모든 게 오래 전 강화 유배 초기의 일이었다. 긴긴 세월 홀로 목숨만 부지해온 왕이 제주까지 밀려와 맞은 생의 말년은 그 얼마나 비참했을까?
제주로 유배 왔던 200여 명의 역사인물들 중 왕의 신분으로는 광해군이 유일하다. 유배가 아니더라도 근대 이전 왕조 시대의 군주 또는 군주였던 인물이 제주 땅에 발을 디딘 경우는 광해군이 유일무이했다. 그런 특별성에 비하면 지금의 제주가 간직한 광해 임금의 흔적은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조선의 임금 한 분이 제주에서 4년간 살다가 생을 마쳤다는 사실 자체가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것 같다.
일반인들에게 광해군의 제주 유배를 알려주는 흔적은 세 군데가 눈에 띈다. 이곳 행원포구의 기착지 표지석이 하나요, 올레 18코스 초입인 중앙로 82번지 KB국민은행 앞에 있는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이 둘, 그리고 세 번째는 국민은행 뒤편으로 중앙로 상점가 주차장 앞 현판 3개 중 하나에 있는 광해군의 ‘칠언시(七言詩)’다.
(중략) 나그네 꿈속엔 임금의 도시가 어른거리누나. 고국의 존망이 어떠한지 소식 끊긴지 오래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만 누워 있구나.’ 유배지가 강화에서 제주로 바뀔 때 지었다고 한다 유배 15년을 넘기던 왕의 외로움과 고단함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광해군은 우리가 오랜 세월 학교에서 배워온 것처럼 연산군과 동급의 폭군만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왕권 강화를 위한 정적 숙청이라면 조선조 초기 몇몇 왕들의 행태와도 객관적 비교가 되어야 한다. 임진왜란에서의 업적과 재위 동안의 실리 자주 외교 등 여러 면에서 광해군의 업적은 현대 관점에 맞게 오늘날 재평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해 임금이 눈을 감은 1641년 7월1일을 전후해 제주에는 많은 비가 내렸고, 그 이후로도 이 즈음에 내리는 비를 일컬어 사람들은 ‘광해우(光海雨)’라고 불렀다 한다. 당시 제주사람들이 품었던 광해 왕에 대한 연민의 일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제주에선 잊혀진 왕, 대수롭지 않은 역사의 단편일 뿐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아쉽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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