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년 전 1909년 9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 1면 하단에 관련 기사 실려
일본인이 점유 시도...의신학교(현 제주고) 측량과 학생이 자비로 한라산 측량하고 막아
당시 제주도민들 한라산 빼앗길까봐 걱정...이 학생의 노력에 도민들 다행으로 여겨
일제강점기 일본인에게 빼앗길 뻔한 한라산을 학생이 되찾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3·1절 103주년을 맞아 학생들의 자발적인 독립운동이 빛을 발하고 있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병합) 한해 전인 1909년 9월 15일 대한매일신보 1면 하단에는 ‘한나산 측량 제주한나산은 그 디방에 뎨일 명산뿐더러 거민의 이익이 불쇼(不少)…’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제주 한라산은 그 지방의 제일 명산일뿐더러 주민이 이익이 적지 않다. 금년 봄 일본인 중년이가 한라산 남쪽을 측량해 인허를 맡은 후로 제주 도민들은 산을 다 잃어버릴까 염려했다. 이 고을 의신학교 측량학도가 측량 경비를 조달해 음력 유월에 그 산을 수효대로 측량을 해 인허를 맡으면서 인민들은 대단히 다행으로 여겼다’는 내용이다.
당시 사료에 따르면 한라산 일부 구역은 기관·단체·개인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았고, 지적도마저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
의신학교(義信學校)는 1907년 제주군수 윤원구가 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에 설립한 도내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다.
1911년 제주공립농업학교, 1951년 제주농업고등학교에 이어 제주고등학교(교장 고용철)로 교명이 변경됐다.
이 기사를 찾아낸 제주고 강영란 교사는 “일제의 토지 수탈에 맞서 의신학교 측량과 학생이 자비로 한라산 구석구석을 측량해 한라산을 우리 것으로 온전히 보전했다”며 “학생이 언허를 맡았다는 것은 지적도에 한라산의 소유 관계를 분명히 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일제는 1910~1918년 토지 수탈과 세입 증대를 위해 한라산을 포함, 제주도 전역에서 토지조사를 명목으로 측량을 했다.
당시 작성된 토지대장 지적도는 1200분의 1로 제작됐으며, 일부 지적도는 제주시 종합민원실 문서고에 보관돼 있다.
일제는 1910년 추자도와 거문도, 어서도에서 한라산, 지미봉, 고내봉의 삼각점을 이용한 삼각측량 방식으로 한라산 높이를 1950.11m로 측정하는 등 산을 수탈하기 위한 작업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농고 학생들은 민족에 대한 차별과 식민지교육에 대한 부당성을 저항하며 1926년 7월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일본인 교사 야나기타 히코지는 조선인을 야만인에 비유하며 경멸했고, 불성실한 가르침에 1·2학년 학생 전원이 동맹휴학과 해당 교사의 배척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22일간 이어졌으며, 1·2학년 전원이 무기정학을 받은데 이어 김창익·강창거 등 15명은 퇴학 처분을 당했다.
동맹휴학에 참여한 홍원표·송두현(19회)은 광주농고에 편입한 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주도적이 역할을 맡았다.
이어 1931년 일제의 황민식민 정책 일환으로 학교에서 ‘천황 칙어’를 낭독하자, 묵념을 하지 않은 김원요 학생이 제적되고, 양두옥·신창진 학생은 유급처분을 받았다.
이 같은 조치에 대해 학생들은 식민지 차별 교육 철폐를 요구하며 스가사키 교장 관사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 14명의 퇴학을 당한데 이어 일부 학생은 옥살이를 했다.
고태리·양치삼 학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각각 1932년과 1937년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교장 관사 습격에 이어 1932년 ‘제농독서회’사건으로 주동 학생 4명이 적발된 가운데 학교 측은 퇴학 조치 시 또 다른 저항이 발생할 것을 우려, 유화정책으로 이들 4명을 광주농고 등으로 전학시킨 후 바로 제적해 버렸다.
제주고와 제주고총동문회는 그동안 모교 출신 독립운동가 64명을 발굴했다. 이 중 29명은 정부로부터 훈·포장과 표창을 받으면서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랐다.
고영철 교장은 “일제시대 학생들의 항일·애국활동을 집대성한 ‘제주고 항일 운동기’를 지난해 발간한데 이어 올해 개관하는 제주고 개교 100주년 기념관에 기사와 사진, 학생기록부, 각종 사료 등을 전시해 독립운동의 산교육장으로 만들어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저항하며 항일운동을 벌이다 퇴학을 당한 이두일· 김기오 선생과 제적을 당한 강일빈 선생 등 20명은 훗날 졸업장을 받으면서 명예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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