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검속 된 성산포 주민 278명 총살 명령 '부당하다 거부'
무장대에 쌀과 옷 내준 모슬포주민 100여명 자수 후 훈방 조치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3 비상계엄 선포로, 탄핵 정국의 충격이 회오리치고 있다.
비정상적이고 위법적인 계엄 선포에도 군경 수뇌부는 주요 인사의 체포·구금을 위해 공권력 동원을 계획해 군경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추락했다.
70여 년 전 제주4·3 당시 계엄의 광풍이 몰아쳤다. 국민을 보호해 할 군경의 총칼에 의해 약 2만명의 도민이 희생됐다.
국가 폭력으로 민간인 집단 학살이 자행됐던 시절,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총부리를 돌린 참 경찰이 있었다.
본지는 을사년 새해를 맞아 문형순 전 경찰서장의 의로운 활약상을 되돌아봤다.
문 전 서장은 1897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 의용군에 이어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2년이 지난 1947년 5월 제주경찰감찰청(현 제주경찰청) 경위로 경찰에 투신했다.
제주4·3이 전개됐던 1949년 1월 그는 초대 모슬포경찰서장 서리로 발령 났다. 당시 군경은 대정읍 하모리의 좌익 총책을 검거, 무장대에 협조한 100여 명의 명단을 입수했다.
입산한 무장대 중에는 가족과 친지, 이웃들이 있었기에 주민들은 자이든 타이든 쌀과 옷, 돈을 내줘야했다. 모슬포지역 주민 약 100명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문형순은 이들을 자수시킨 후 훈방해 목숨을 구했다.
그는 같은 해 10월 경감으로 승진한 후 성산포경찰서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자 내무부 치안국은 후방의 민심 교란을 우려해 불순분자를 검거할 것을 도내 4개 경찰서(제주·모슬포·성산포·서귀포)에 지시했다.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놓는 일)으로 검거된 이들은 4·3사건에 연루됐던 이유로 경찰이 명부를 작성해 관리해왔던 귀순자·자수자·석방자들이었다.
경찰은 자의적 기준으로 연행하기도 했다. 무고나 밀고, 개인적인 원한으로 검거된 것이 그 사례다. 1500여명의 예비검속자 중에는 공무원과 교사, 농민, 학생, 부녀자는 물론 우익단체장도 있었다.
예비검속자에 대해 총살을 명령하고 집행한 것은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방첩대와 제주지역 계엄군인 해병대, 그리고 제주도 경찰국이었다.
그러나 성산포경찰서에 내려진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은 집행되지 않았다. 문 서장이 군의 총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문 서장은 1950년 8월 30일 발송된 명령서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적으면서 불법·부당한 명령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전시 등 비상계엄 하에서 상관의 명령에 항의 또는 거부하는 명령 불복종은 항명죄로 본인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문 서장은 의로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예비검속자 중 제주시에서 1000여명, 서귀포에서 150여명, 모슬포에서 250여명이 총살됐지만, 성산포 관내 278명은 목숨을 부지했다.
문 서장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모슬포에서 100여명, 성산포에서 278명 등 총 378명의 희생을 막아냈다.
1953년 9월 제주경찰청 보안과 방호계장을 끝으로 퇴직한 문 전 서장은 말년에 생계가 힘들었는지 쌀 배급소를 운영했다가 극장의 매표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전해졌다.
독신으로 지낸 온 그는 1966년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에 별세했고, 묏자리도 없어서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경찰청은 2018년 문 전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지만, 입증자료 미비 등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은 6차례나 불발됐다. 이에 경찰청은 문 전 서장이 6·25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지리산전투사령부에 근무한 이력에 착안해 국가보훈부에 참전유공 서훈을 요청, 참전유공자로 등록했다.
지난해 5월 고인은 작고한지 58년 만에 국립제주호국원에 영면했다.
좌동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