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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 이야기(5) 제주의 젖줄 산지천을 방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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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2022. 1.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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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산지천은 제주성의 젖줄이었다. 1565년 곽흘 목사는 산지천을 성안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동성(東城)을 뒤로 밀려서 현재의 제주지방기상청까지 성곽을 확장했다.

▲ 1924년 일제가 북수구를 보수해 난간을 설치한 모습. 북수구 안팎의 풍경이 잘 드러나 있다.

산지천을 들여 온 것은 성안에 샘물이 없어서 산지천변 가락천(嘉樂泉·가락쿳물)의 음용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또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도 있었다. 1555년 왜구 1000여 명은 산지천 남수각 동쪽 언덕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며 공격을 했고, 3일 동안 제주성을 포위했다.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선 산지천을 성안으로 끌어 들일 수밖에 없었다.

1599년 성윤문 목사는 산지천의 물을 이용하고 흘려보내기 위해 남수구와 북수구 2개의 수구(水口)를 축조했다.

제주성에 수로가 생기면서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기 위해 무지개모양의 아치형 돌다리인 홍예문(虹霓門)이 설치됐다.

수구 위에는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문과 누각이 결합된 기와 건축물로 사방을 두루 살피는 초소 역할을 한 문루(門樓)가 건립됐다.

조선 후기에는 성안의 형세를 한 눈에 조망하기 위해 문루 대신 기둥과 지붕만 있는 정자(亭子) 건물이 들어섰다.

오현단 인근 남수구 남쪽 모퉁이 가장 높은 곳에는 방어 및 감시 기능을 한 제이각(制夷閣)이 설치됐다.

같은 목적으로 현재의 산지천 북성교 인근에 있던 북수구에는 죽서루(竹西樓)가 세워졌다。

 

1652년 거센 폭풍우로 남·북수구가 무너졌다. 1년 뒤인 1653년 이원진 목사가 수구를 개축하고 죽서루 대신 공신루(拱辰樓)를 새로 지었다.

아름다운 돌다리인 홍예문과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던 문루와 정자는 폭우와 홍수로 자주 허물어져 버렸다.

더구나 남수구와 북수구 보수 공사가 농한기인 겨울철에 이루어지다 보니 노역을 하던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도민들은 오죽하면 원망만 쌓인다고 하여 제주성을 원축성(怨築城)이라 부르기도 했다.

산지천을 성안으로 끌어들인 결과 하천이 범람 할 때마다 침수 피해가 발생했다.

집중호우가 내릴 때마다 산저천이 범람해 민가가 침수되자 1780년 김영수 목사가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산지천 서안을 따라 제방용 성곽인 간성(間城)을 쌓았다. 간성은 높이 9척(2.7m), 길이 551보(689m) 규모로 축성됐다.

산지천 서쪽에는 민가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곳은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성안에 또 성을 쌓는 간성이 구축된 것이다.

반면 간성이 없었던 하천의 저지대인 동쪽에는 광복 후까지도 민가가 없었다.

 

간성을 출입하기 위해 2개의 문이 설치됐다. 간성 남문은 소민문(蘇民問), 북문은 수복문(受福問)이라 명명됐다.

홍수로 인한 유실로 북수구 보수공사가 반복되자 1831년 이예연 목사는 북수구 초소 겸 방어시설인 공신루를 지금의 제주지방기상청이 있는 금산 언덕으로 이전했다.

아치형 석조 건축물인 남·북수구는 산지천이 범람할 때마다 무너져 내렸다.

사료에 따르면 남·북수구는 1653년 이원진 목사가 중건했고, 1720년 민제장 목사가 개축했다. 1768년 남익상 목사가 수축했고, 1808년 한정운 목사가 개축했다. 1870년 조희순 목사가 수선했고, 1887년 심원택 목사가 개건하는 등 홍수로 인해 6번이나 다시 짓거나 보수공사를 했다.

무지개다리인 남·북수구 홍예문은 일제시대인 1927년 8월 7~8일 이틀간 하천 범람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이후에는 복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흑백사진으로 옛 모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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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주의 젖줄 산지천을 방어하라 - 제주일보

▲ 1924년 일제가 북수구를 보수해 난간을 설치한 모습. 북수구 안팎의 풍경이 잘 드러나 있다.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산지천은 제주성의 젖줄이었다. 1565년 곽흘 목사는 산지천을 성안으로 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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