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관아 건물을 모두 허물었지만 제주의 상징인 관덕정은 그대로 뒀다.
그러나 1924년 도사(島司) 마에다 요시지는 신작로를 내면서 도로에 처마가 걸린다는 이유로 15척(454㎝)이나 되던 긴 처마의 끝부분을 2척(60㎝) 이상이나 잘라냈다.
날아갈듯 한 팔작지붕의 처마는 잘려 나가 아름다운 곡선의 미를 상실했다.
관덕정은 굴곡진 역사와 영욕의 세월에서 주요 무대가 됐다. 1901년 신축교안(이재수의 난) 당시 관덕정 앞에서 천주교인 등 316명이 학살됐다.
민란의 장두에 선 이재수 역시 관덕정 광장에서 목이 베어졌다.
1947년 관덕정 앞에선 3·1시위가 열렸다. 당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진 사건은 4·3의 도화선이 됐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하자 관덕정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그 해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자 시신을 십자형 틀에 묶어 본보기로 관덕정 앞에 세워 놓았다.
1949년 일제가 지은 도청 건물이 방화로 소실되자 관덕정의 사면을 판자로 막고, 창문을 달아 임시 도청 청사로 사용했다.
1952년에는 도의회 의사당, 북제주군청 임시 청사에 이어 미문화공보원으로 이용됐다.
1959년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면서 관덕정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1963년 국보에서 보물 제322호로 재 지정된 관덕정은 제주지역에 소재한 4개의 보물 가운데 지정연도가 가장 빠른 국가 소유의 보물이 됐다.
1999년에는 74년 동안 중단됐던 제주입춘굿놀이가 이곳에서 재연된 후 매년 입춘일에 열리고 있다.
제주시는 2003년 27억원을 들여 관덕정을 완전히 해체한 뒤 부식된 목재와 변형된 구조물을 교체하는 전면적인 보수공사에 나서 3년 만에 원형을 되찾는 복원 사업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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