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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제주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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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2024. 1. 1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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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도서관, ‘1930년 전라남도 사정지(事情誌) 제주도편’ 번역본 발간
일제시대, 소 5천마리로 통조림 생산...1000마리는 일본으로 반출
해녀들의 생산량은 섬 전체의 경제계에 큰 영향을 준 중요 산업

 

일제시대 제주도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당도서관(관장 김현아)은 약 100년 전 제주의 현황을 담은 ‘1930년 전라남도 사정지(事情誌) 제주도편’번역본을 발간했다고 10일 밝혔다.

1930년 전라남도 사정지(事情誌) 제주도편 번역본.

 

책자를 보면 당시 제주의 농작물 중 1위는 보리로, 생산액은 연간 31만석에 달했다. 보리다음 주요 작물은 조, 고구마로 나타났다.

고구마의 연간 생산량은 105만관(3750t)으로 다른 식량이 없어도 제주도민들이 60일을 지탱할 수 있어서 일제는 재배를 장려했다.

감귤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재배됐으며, 종류는 12가지 이상으로 소개됐다. 연간 생산량은 4만8400관(181.5t)이었다.

축산업은 소 사육이 가장 활발해 1926년 제주에서 생산된 생고기 10만근(60t)이 일본 교토로 반출됐고, 이어 제주에 쇠고기통조림 공장이 설치됐다. 당시 제주에서 통조림으로 가공된 소는 연간 5000마리에 달했다.

제주산 소는 일본에 반출됐는데 1923년 557마리에서 1928년 1065마리로 갑절 가까이 늘었다.

수산업은 1910년 2900여 호에 어획고는 25만9000관(155.4t)에서 1928년 6797호에 671만9392관(4031t)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100년 전 제주 해녀는 조선 각지는 물론 일본에서도 그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연안에서 해조류와 패류를 채취하는 것은 부녀자에 의해 이뤄졌다. 해녀들의 생산량은 섬 전체의 경제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중요 산업으로 소개됐다.

1925년 기준 제주 인구는 조선인 20만9841명, 일본인 1083명, 중국인 87명 등 총 21만1011명이다. 3년 뒤인 1928년에는 조선인 20만4420명, 일본인 1116명, 중국인 73명으로 20만5609명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조선인 인구 감소는 일본과 육지로 나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인 거주미의 60%는 관공서 직원으로 나타났다.

당시 제주에서 활약한 사업가 19명(일본인 18명·조선인 1명)도 소개됐다.

제주의 대표 사업가는 서귀포시 법환동 출신의 강성익 선생(1890~1968)으로 통조림공장과 단추공장을 비롯해 많은 토지를 소유했고, 1928년 제주남부운수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벌이는 사업마다 성황을 이뤘다고 밝혔다.

이 책자는 1928년 목포상업회의소 서기(書記)인 시바하라가 기획, 관청과 여러 단체의 자료를 받아 원고를 작성하던 중 사정이 여의치 않자, 목포의 기야마인쇄소로 원고를 넘겼고, 인쇄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소메카와가 편찬한 것이다.

김현아 관장은 “1930년 제주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과 요리점을 비롯해 모슬포와 성산포에 통조림공장과 요오드공장이 들어섰고, 제주 전역에 일본인 교사들이 채워진 학교가 설립되면서 제주의 전통과 공동체 가치관은 단절된 식민지 풍경들이 제주사회를 지배하게 됐다”며 “비록, 일본인이 기록했지만 이를 반면교사 삼아 제주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좌동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