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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의 색다른 제주여행] 제주 메밀밭과 자청비…섬사람에 전해진 신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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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2023. 5. 3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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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메밀 주산지는 제주지만 사람들에게 인식 부족해
4년 만에 열리는 메밀꽃 축제...접근성 좋고 풍경 뛰어나
농업의 신 자청비, 메마른 땅 곳곳 씨앗 심어 숭앙 받아

 

소바(蕎麦, そば)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일본 음식이다. 비슷한 음식인 우리의 막국수는 강원도 향토음식이지만 요즘은 지역에 상관없이 전국적 음식이 되었다. 김칫국물에 말았거나 전분을 조금 섞었을 뿐이지 이 역시 메밀국수다. 이효석이란 이름은 가물가물해도 단편 ‘메밀꽃 필 무렵’ 제목만큼은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작가의 고향인 평창군 봉평은 단편소설 덕택에 유명 관광지로 변모했다. 이 지역의 ‘메밀꽃축제’ 또한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메밀’ 하면 사람들 머릿속에 우선은 강원도가 떠오르는 이유들이다.

제주시 오라동 메밀밭에서 방문객들이 활짝 핀 메밀꽃 사이를 산책하고 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국내 메밀의 주산지는 강원도가 아닌 제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재배면적과 생산량 면에서 제주가 전국의 3분의 1을 넘나들고, 강원도 경우는 제주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다만 제주에선 가공시설이 부족하다 보니, 제주산 메밀이 강원 등 육지로 옮겨져 가공된 후에 해당지역 브랜드로 유통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메밀은 거친 땅에서도 적응력이 뛰어나고 재배기간이 짧다는 특징이 있다. 가뭄이나 장마 또는 병충해의 영향도 덜 받으니 농부의 손길도 덜 필요하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을 일궈온 제주사람들에게 메밀은 그 옛날 어려운 시절을 버티게 해준 보배와 같은 구황작물이었다.

메밀 주산지이긴 하지만 제주의 메밀음식은 지극히 지역적이다. 강원도 막국수처럼 지역을 넘어 보편화된 메뉴는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 메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수제비인 ‘조배기’나 무를 넣은 메밀 전병인 ‘빙떡’ 등은 옛날과 달리 요즘의 제주인들 식탁에선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다. 반면 메밀가루를 넣은 ‘몸국’이나 꿩메밀국수 같은 메뉴들은 제주향토 음식점에서 외지인들에게 점차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걸쭉한 국물의 맛도 일품이고 특히 건강 식단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길고 어두웠던 코로나 터널을 뚫고 지나온 지금, 제주시 오라동 일대 30만 평 대지에서 메밀꽃 축제가 다시 열린다. 지난 2019년 제4회가 열린 이후 4년만이다. 정식 명칭은 ‘제5회 제주오라 메밀•유채꽃축제’, 5월 25일부터 한 달간 열린다. 물론 20주년 된 봉평메밀꽃축제에 비하면 20대 청년과 유아 사이의 수준 차이다. 그러나 제주는 제주의 맛이 있다. 인위적이지도 않고 조미료도 배제된, 천연재료만으로 우려낸 토속 자연축제의 맛이다. 접근성도 좋다. 제주공항에 내리면 승용차로 30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한라산 중턱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축구장 백여 개 넓이에 펼쳐진 장관을 만나게 된다. 하얀 물보라에 덮인 바람 찬 바다 또는 가을에 함박눈 내려 쌓인 설원을 떠올리게 한다. 위로는 한라산 백록담과 오름들이 그윽하고 저 멀리 아래로는 푸른 바다와 제주시내 정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국 메밀의 3분의 1 이상을 생산하는 만큼 제주에는 오라동 외에도, 조천면 와흘리나 표선면 성읍리 등 메밀밭 단지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애월읍 항파두리 주변의 메밀밭들은 올레길 코스에 속해 있음으로 해서 많은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주 메밀의 유래에 대해선 ‘자청비’라는 여신에 얽힌 설화가 유명하다. 늦도록 자식이 없어 상심하던 김진국 대감 부부는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 덕에 겨우 딸 하나를 얻었다. 불공이 2% 모자랐는지 아들이 아닌 딸이다. 그런데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면 딸이 아닌 아들이다. 이 여자아이 자청비는 남자 못지않게 적극적이고 화통한 성격이라 매사에 천방지축 왈가닥으로 자랐다.

열다섯 되던 해에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아들 문도령을 만났는데, 한눈에 마음에 들었나 보다. 곧바로 남장을 하곤 도령을 따라 나섰다. “여전히 나를 남자로 알고 있는 답답한 문도령아!” 3년간 함께했던 글공부를 마치고 헤어질 때에야 자청비는 자신이 여자임을 밝혔다. 깜짝 놀란 문도령은 그녀와 결혼을 기약하곤 아버지 부름에 응하여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세월이 가도 소식이 없자 자청비는 직접 하늘나라로 문도령을 찾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그를 만났고 어려운 관문을 대범하게 통과하여 드디어 문도령과의 혼인에 성공했다. 집안 살림은 물론 궁중 살림도 잘하고 성격도 활달했기에 옥황상제의 며느리로서 너무 잘한다고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평안과 행복도 잠시, 하늘나라에 큰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자청비가 여인의 몸으로 직접 출동하여 난을 진압함으로써 옥황상제와 문도령을 위험에서 구해냈다. 크게 기뻐한 옥황상제는 상으로 땅을 주려 했지만 자청비는 오곡의 씨앗을 요구해 받아냈다. 이를 가지고 문도령과 함께 고향 제주 땅으로 내려왔다. 하늘나라에서 가져온 씨앗들을 섬 여기저기에 심고 보니 다섯 종자 중 하나가 빠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부랴부랴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간 자청비는 마지막 종자를 되찾고 돌아와선 뒤늦게 밭에 심었다. 오곡의 씨앗 중 마지막으로 심은 이 종자가 바로 메밀이다.

하늘나라에 다녀오는 바람에 한발 늦게 파종은 했지만 수확은 다른 농작물들과 같은 시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 메밀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생육 기간이 짧아 이모작도 가능하게 된 건 자청비의 이런 수고와 정성 때문이다. 처음에 메밀을 하늘나라에 빠트리고 온 것이 제주인들 식생활에는 결과적으로 이로움을 준 것이다. 이후 자청비는 섬사람들의 식생활을 책임지는 농업의 신이자 곡물의 신으로 숭앙받았다. 제주 섬의 창조주인 설문대할망 휘하에 바다에는 어업을 돌보는 외방신 영등할망이 있고, 대지에는 농사를 관장하는 농업의 신 자청비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