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전국 재배면적의 66%...생산량 1위
빙떡·메밀전 등 향토음식 100여 개 달해
봄과 가을에 제주에서는 팝콘이 쏟아진 것처럼 하얗게 물든 메밀꽃밭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제주는 우리나라 최대 메밀 생산지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를 잘 모른다. 메밀 하면 대부분이 이효석 작가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강원도 봉평을 떠올려서다.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은 척박한 환경을 일구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제주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메밀은 농경의 여신인 자청비가 하늘에서 갖고 내려온 곡물 중 하나로 등장하기도 한다.
자청비가 하늘에서 인간 세상을 위해 곡식 종자를 품에 안고 내려왔다가 깜빡 잊고 두고 온 것이 메밀 씨앗이란 전설이 있다.
메밀은 보통 메밀(단 메밀)과 쓴 메밀로 구분된다. 보통 메밀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일반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품종이고, 쓴 메밀은 보통 메밀보다 쓴맛이 강해 붙은 이름이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해녀 원기 회복용으로 몸국에 메밀을 넣어 단백질을 공급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미역국에 메밀을 넣어 혈액을 맑게 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가난한 시절 친정 부모 제삿날에 빙떡을 만들어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게 해준 효성의 곡물로 이용하는 등 제주 여인의 강인한 삶과 문화에 깊숙이 베어 있다.
▲제주 메밀, 재배면적·생산량 ‘전국 1위’…슈퍼푸드로 각광
통계청에 따르면 제주지역 메밀 재배면적은 2021년 기준 1426㏊로, 전국 재배면적 2148㏊의 66.4%를 차지하고 있다. 재배면적 국내 2위 지역인 경북(199㏊)의 7배가 넘는다.
또 같은 해 전국 메밀 총 생산량 1967t의 60%에 육박하는 1127t이 제주에서 수확됐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강원도와 비교하면 재배면적은 7.5배 더 넓고, 생산량은 7.3배 더 많다.
메밀은 기능성 물질인 루틴을 함유해 체내 유해 물질인 활성산소와 과산화 물질 생성을 억제하는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
모세혈관 탄력성을 높여 혈압을 낮추는 효능도 있다. 혈액 중 나쁜 콜레스테롤(LDL)은 낮추고, 좋은 콜레스테롤(HDL)은 높여 고지혈증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특히 쓴 메밀은 다른 곡식에서 보기 드물게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다. 지방은 80% 이상이 불포화 지방산이다.
8가지 필수 아미노산을 포함한 19가지 아미노산과 비타민, 10가지의 광물질 영양소도 다량 함유하고 있다.
또한 메밀은 엽산이 풍부해 태아의 발달을 돕고, 빈혈을 막는 역할을 한다.
메밀에 들어 있는 비타민 B1과 B2는 피부 건강과 피로 해소에도 도움을 준다.
100g당 114칼로리로 열량이 낮은 점도 다이어트를 하거나, 생각 중인 바쁜 현대인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메밀은 찬 성질을 지니고 있어 평소 소화 기능이 떨어지거나, 찬 음식 때문에 설사를 자주 한다면 적당량을 먹어야 한다. 메밀 알레르기가 없는지 확인도 해보자.
▲메밀음식만 100여 가지…뭘 먹어야 하나
메밀은 제주도민들과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식재료다. 예로부터 제주에서는 메밀을 활용해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2019년 제주특별자치도 농업기술원이 발간한 ‘제라진(최고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 제주메밀음식’ 책자에 소개된 메밀음식만도 100가지가 넘는다.
가장 널리 알려진 메밀 향토음식 중 하나가 바로 ‘빙떡’이다. 메밀가루에 소금과 달걀 흰자, 참기름을 넣고 고루 섞어 만든 반죽을 기름 두른 팬에다 부쳐 삶아 익힌 채 썬 무를 넣어 돌돌 말아내면 완성된다.
빙떡은 제사·혼례·상례 등 제주에서 큰일을 치를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설이나 추석 명절 차례상에 오르기도 한다.
메밀칼국수도 대표적인 메밀음식 가운데 하나다. 메밀은 밀가루와 다르게 글루텐 단백질을 갖고 있지 않아 점성이 약하고, 질김 정도도 약한 만큼 밀가루를 약간 섞어 칼국수를 해 먹으면 맛도 좋고, 소화흡수율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메밀전도 많은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메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체에 내린 뒤 밑간 또는 양념을 한 무와 김치, 표고버섯, 시금치, 숙주 등을 넣어 팬에서 노릇하게 지지면 완성이다.
메밀의 루틴, 칼륨, 비타민 B1 등 대표적인 영양소는 수용성을 띠어 메밀을 물에 삶으면 쉽게 우러나기 때문에 메밀을 삶거나, 우린 물은 버리지 말고 차 등 음료 대용으로 마시는 것도 좋다.
이 외에도 메밀묵, 몸국, 접작뼈국, 메밀만두는 물론 김치찌개와 케이크, 머핀, 비스킷, 마들렌, 수프 등 메밀을 활용한 음식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쌀과 함께 조리한 메밀밥이 인기다. 메밀에는 쌀에 부족한 영양소가 많아 상호 보완 효과를 누릴 수 있어서다. 쌀 7, 메밀 3 정도가 황금비율이다.
▲‘메밀꽃 물결’ 경관적 가치 으뜸…관광자원·6차산업과도 연계
봄(5~6월)과 가을(9~10월) 제주 곳곳에서 팡팡 터진 팝콘이 쏟아진 듯 하얀 꽃송이로 가득한 메밀밭을 만나볼 수 있다.
국내 가장 큰 메밀밭도 제주에 있다. 5·16도로와 1100도로를 잇는 제주시 오라동 산록북로에 자리한 이 메밀밭은 전국에서 단일 규모로 가장 넓은 99만㎡(약 30만평)을 자랑한다. 축구장(7140㎡) 130개를 합한 것보다도 넓다.
남쪽으로는 한라산과 오름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바다와 제주시내 풍광이 메밀꽃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이 메밀밭을 소유한 농업회사법인 제주오라(대표 문승환)가 코로나19 유행 당시 출입명부 운영 등을 통해 확인한 한 해 방문객만 30만명이 넘는다.
제주오라는 코로나19 이후 중단한 ‘오라동 메밀꽃 축제’를 올해부터 다시 열기로 했다.
문승환 대표는 “방문객들이 좋은 추억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다양한 먹거리와 체험, 공연 프로그램들을 마련할 계획”이라며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조선시대 당시 제주는 유배지였다는데 척박한 땅에서도 부지런하고, 해낼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제주인의 삶과 닮았다”고 말했다.
메밀꽃은 모양이 아름답고, 개화 기간이 매우 길며, 제주의 오름 등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경관적 가치가 높은 작물이다.
전국 재배면적·생산량 1위, 청정지역 이미지와 함께 메밀 관련 역사, 문화 자원을 결합해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면 제주를 대표하는 웰빙·건강식품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제주의 경우 기후적 요건으로 메밀 이모작 재배가 가능해 5월부터 10월까지 원하는 시기에 꽃을 피울 수 있고, 이를 축제나 행사 개최와도 연계해 농가 소득을 증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이와 관련, 제주도는 2015년 전국 최초로 ‘제주메밀 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관광산업과 연계한 6차산업 육성, 생산·가공 등 산업화 기반 구축, 문화상품 개발, 고부가가치 기능성 제품 개발·연구 등을 지원하고 있다.
제주도 농업기술원은 지난 4월부터는 메밀을 지역 특화작목으로 육성, 부가가치 향상과 소비시장 확대를 위해 가공상품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사업을 통해 메밀국수 건면, 메밀커피 개발을 목표로 삼고, 개발된 시제품을 축제나 행사 등을 통한 홍보와 소비자 조사를 병행해 시장성 높은 상품을 개발하겠다는 구상이다.
강원도 봉평을 배경으로 한 ‘메밀꽃 필 무렵’처럼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메밀에 대한 작물 기원과 특징, 형태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자청비 신화를 스토리텔링화하는 데 행정 차원에서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진유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