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추념식에서 1941년생 이삼문씨, 박삼문으로 살았던 기구한 운명 소개
아들 박상일씨 "7월 가족관계 정정되면, 이삼문의 아들로 살고 싶다"고 밝혀
“오늘도 저와 아버지는 이배근 할아버지 후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봉행된 제75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서는 1948년 4·3당시 부모와 할머니, 두 형, 누나를 잃고 1941년생 이삼문(82·전남 거주)이 아닌 가명인 1953년생 박삼문이라는 이름으로 팔십 평생을 살아온 기구한 사연이 소개됐다.
제주시 노형동이 고향인 이삼문씨는 4·3당시 토벌대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 우연히 만난 해군장교에 의해 전남 목포의 한 고아원에 맡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이씨는 목포를 점령한 북한군을 피해 작은 굴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구걸 생활을 이어가던 이씨는 전남 해남군 공무원 박모씨의 집에 머물면서 머슴생활로 값을 치르며 지냈다.
이씨는 여기서 박씨 집안 호적에 오르면서 ‘박삼문’으로 살아왔다.
박삼문씨의 아들 박상일씨는 이날 추념식에서 열린 유족 사연 소개에서 “4·3으로 아버지 성이 바뀌면서 저도 이씨가 아닌 박씨로 살아왔다”며 “사연을 알게 된 뒤 저는 아버지가 불쌍해서 방구석에서 한없이 울기만 했다”고 흐느꼈다.
박씨는 “2016년 아버지가 66년 만에 제주를 찾아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 갔을 때 할아버지 이배근 위패 옆에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이삼문’의 위패도 있었다”며 “저희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있지만 사망한 사람이 됐고, 희생자 취소신청으로 다시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됐다”며 “그러나 아버지와 저는 성도 주민등록번호도 달라 할아버지인 이배근 희생자 가족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박씨는 “다행히 7월부터 희생자와의 친생자 확인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저는 이배근 할아버지 후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며 “그날이 오면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있는 가족을 향해 큰절을 올리겠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추념식에 이어 진행된 문화제에서도 도외 거주 유족의 사연이 소개됐다.
제주시 한림읍 출신으로 현재 경기도에 거주하는 임충구씨는 단상에 올라 폭도로 몰리고 연좌제로 겪어야 했던 아픔을 전했다.
임씨는 “4·3당시 폭도로 몰려 산으로 간 후 행방불명된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는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부모를 잃은 제가 남은 건 ‘폭도자식’이라는 주홍글씨뿐이었다”며 “레드 콤플렉스가 평생 저와 제 가족을 옭아맸다”고 말했다.
임씨는 “아버지가 4·3특별재심에서 대상자 68명 중 사상검증을 다시 해야 한다는 4명에 포함돼 또다시 레드 콤플렉스 굴레에 갇혀야 했다”며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아 아버지 영전에 판결문을 올릴 수 있었다”고 전했다.
좌동철 기자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