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용 회장 "73년 전 공항에서 학살된 아버지 양지바른 곳에 묻혔으면"
1950년 제주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199명 제주공항서 집단학살 암매장
4.3평화재단, 2007~2009년 유해발굴 사업에도 단 한구도 찾지 못해
활주로 바닥을 샅샅이 훑었지만, 과거보다 5m나 복토 유골 찾기 어려워
“아버지 유해가 70년이 넘도록 제주국제공항 활주로에 묻혀있어서 한이 맺힙니다.”
한문용 제주북부예비검속 희생자유족회장(73·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은 29일 제주시 용담공원에 들어선 위령비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전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백흥 애국지사로 조천3·1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초대 함덕리장을 역임했다.
1948년 11월 마을청년 6명을 총살하려던 군인들에게 “말테우리(목동)인 청년들은 소와 말을 돌보기 위해 산으로 간 것으로, 신원을 보증할 데니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청년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2의 4·3이나 다름없는 ‘예비검속’ 광풍이 불어 닥쳤다.
당시 정부는 북한군이 부산·경남을 점령할 경우 제주도를 최후의 피난처로 삼기 위해 도내에 있는 불순분자와 요시찰인물을 검거(예비검속)해 처형하도록 했다.
한 회장의 아버지(한재진)는 제주농업학교를 나온 엘리트로 스무살 젊은 나이에 제주항 인근 주정공장에 끌려갔다. 이어 제주공항에 총살당한 후 암매장됐다.
한 회장은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리면서 아버지마저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저는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통과했는데 연좌제에 엮이면서 면접조차 보지 못했다”며 아픈 기억을 삼켰다.
경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도내 4개 경찰서(제주·모슬포·성산포·서귀포)에서 예비검속 된 도민은 1120명이다.
이 중 제주북부(제주읍·조천면·애월면) 예비검속자는 500여 명에 달했다.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와 목격자들은 1950년 8월 19~20일 이틀간 제주공항에 끌려간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증언했다.
제주4·3평화재단은 4·3당시 ‘사형장’으로 불리며 최대 학살터였던 제주공항에서 2007~2009년 3년간 유해발굴을 실시했다. 4·3당시 암매장된 388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유전자 감식으로 90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신원이 확인된 90명은 ▲1949년 군사재판 사형수 47명 ▲서귀포 예비검속 13명 ▲모슬포 예비검속 7명 ▲일반인 23명이다.
서귀포 예비검속자들은 정방폭포 앞 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주공항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희생자가 가장 많은 199명이 암매장 된 제주북부 예비검속자들의 유골은 단 한구도 나오지 않았다.
유해 발굴사업 책임자였던 박근태 일영문화유산연구원장은 “활주로만 빼고 제주공항 전 구역에서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제주북부예비검속 희생자는 단 한 구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2018년 지표투과 레이더(GPR)와 동굴 탐지 장비까지 동원해 활주로 바닥을 샅샅이 훑었지만, 1979년 동서활주로 확장 당시 과거보다 5m 높이로 복토돼 유골을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활주로의 기초골재를 돌덩이가 아닌 모래나 점토로 했다면 지표레이더로 북부예비검속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한편, 1973년 길이 2000m·너비 45m의 남북활주로 개설공사 당시 유골이 무더기로 나오면서 근로자는 물론 장비까지 모두 교체됐고, 일부 유골은 제주시 어승생무연고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좌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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