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 딸 강길여씨가 말하는 애국지사 故 강관순 선생
“아버지와 함께 해녀항일운동을 했던 주동자들이 검거돼 투옥됐을 때 동지였던 오문규 선생의 부인이 면회를 왔고, 오 선생의 부인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쓴 시를 담배꽁초처럼 말아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 시가 ‘해녀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27일 제주시 우도면 자택에서 만난 강길여(82)씨. 독립유공자의 집 현판이 우선 눈에 띄었다.
강씨는 강관순 애국지사의 유일한 혈육이다.
강관순 지사(1909-1942)는 강철(康哲)이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고향 우도로 돌아와 영명의숙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물질로 낮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여학생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했다.
1931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돼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아내 김유생과 함께 함경북도 원산을 거쳐 청진으로 옮겼다. 옥고의 후유증으로 3년을 앓다 1942년 청진에서 병사했다. 정부는 2005년 3월 강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지난해 제주해녀항일운동 90주년을 기념해 우도면 오봉리 강 지사의 옛 생가 부근 바닷가에 ‘해녀의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강씨는 “아버지의 노래가 둥둥 떠다니는 우도 앞바다에서 평생 물질을 하며 살았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나도 죽었다’며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며 “마을 사람들이 ‘강철 선생의 딸’이라고 항상 얘기해주었다. 그 말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어머니 뱃속에서 유복녀로 태어난 강씨는 아버지를 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부터 아버지 강 지사의 항일운동의 행적을 하나부터 열까지 들을 수 있었다.
신재홍, 김성오, 강관순. 이 세 사람은 항일운동의 동지였고, 무엇이든 함께 도모하는 사이였다. ‘우도 삼천재’로 불렸다. 그뿐만 아니라 강씨는 하도리의 독립운동가 오문규 선생과 세화리의 김시곤 선생에 대한 얘기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강씨는 “똑똑한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나 같은 딸이 나왔는지 부끄럽지만, 아버지의 행적과 이웃 어르신들의 용감한 행적을 기억하려고 애썼다”며 “그것이 딸인 내가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씨는 “어머니 역시 해녀항쟁 얘기가 나오면 ‘우도해녀 강창순’을 얘기했다. 연설도 잘하고, 행동도 다부졌다고 한다. 강창순 해녀는 1931년 우도 대표로 강기평, 강순인과 함께 세화장터 항쟁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강창순 해녀는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진 이름들에 대해 어머니는 늘 안타까워 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강씨는 “아버지의 삶을 기억해주는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하며 “기억해야 할 사람이 정말 많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애국은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해 3·1절 제104주년을 맞는다. 또한 제주해녀항일운동 91주년을 맞는 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 앞에서 자신의 일생이 한 편의 역사서가 된 사람들이 있다. 애국지사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며 그날의 역사를 전달해온 사람들이다.
우도에는 ‘강철 선생의 딸’ 강길여가 산다.
김형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