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주년 맞은 제주4·3, 국가 피해 보상 본격화
아픔은 접고, 기부 릴레이로 미래 세대 평화 추구
따뜻한 선행, 새해에 인권·상생의 제주로 도약
제주4·3이 어느덧 75주년을 맞이했다. 계묘년 새해에는 4·3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피해 보상이 본격화된다. 올해는 2차 대상자 2500명에 대한 보상금 청구 접수가 진행된다. 본지는 과거의 아픔과 슬픔을 딛고 따뜻한 선행을 이어가는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한국판 쉰들러’ 공동묘지에 쓸쓸히 안장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은인이 문형순 경찰서장이다. 작은 정성을 모아 고인을 양지바른 곳으로 모셔야 한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살고 있는 4·3생존희생자 강순주씨(91·서귀포시)는 지난해 국가로부터 받은 보상금 4500만원 중 1000만원을 제주4·3희생자유족회에 기부했다. 그는 아내의 간병비로 매달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지만 온정의 손길을 내밀었다.
4·3당시 자신을 살려준 고(故)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의 의로운 뜻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다.
강씨는 일본 나고야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징용을 당한 한국인들이 비행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됐다. 그래서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인 표선면 가시리로 돌아왔다.
일본말은 유창하지만 한국말이 어눌했던 16살 소년은 1948년 4·3의 광풍에 휩쓸렸다. 산사람들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옛 제주농고에 수감됐다. 이웃에 살던 청년 3명이 고문에 못 이겨 그를 좌익활동 가담자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강씨는 온갖 취조와 고문을 당했지만, 조서에 끝까지 손도장을 찍지 않았다. 하지만 졸속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금고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8살에 끝날 삶을 이어준 은인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섬 전역에서 예비검속이 자행됐다. 그는 불순분자라는 누명을 쓰고 성산포경찰서에 연행된 후 제주항에 있는 주정공장에 끌려갔다. 총살형으로 18살의 짧은 삶이 끝나려던 순간, 가까스로 풀려났다.
그는 “살아남게 된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다. 문형순 서장이 군의 명령에 항명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문 서장은 성산·구좌·표선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221명을 총살하라는 군의 명령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 하겠다’며 지시에 따르지 않고 이들을 풀어줬다.
‘한국판 쉰들러’라 불렸던 문 서장은 말년에 대한극장(현대극장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했고, 1966년 향년 70세에 홀로 생을 마감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문 서장은 가족이 없어서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이북도민 공동묘지에 쓸쓸히 안장됐다.
강씨는 “문 서장의 의로움을 받들어 1953년 해병 16기로 입대해 7년2개월을 해병으로 복무했다. 문 서장의 기일인 6월 20일마다 제사를 지내고 벌초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국립제주호국원을 방문, 문 서장이 안장될 수 있는지 물었지만, 유족이 없어서 쉽지 않았다”며 “주위에서 관심을 갖고 도와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독립유공자이자 4·3희생자인 한백흥 지사의 손자 한하용씨(77)도 자라나는 세대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며 자신의 몫으로 받은 보상금 375만원을 기부했다.
김홍수 제주4·3유족회 서부지회장(74)도 정부로부터 받은 형사보상금 중 일부인 50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와 고통을 당한 이들이 75년이 흐른 지금, 올바르고 정의로운 4·3을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좌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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