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희 공정위 상임위원으로 승진, 불공정행위 심판맡아
본사의 ‘물량 밀어내기’ 사건 응징…대리점주 보호에 앞장
대형마트 할인행사 이면에 눈물 흘리는 유통업자들 보호
‘불공정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1981년 설립된 공정거래위원회는 중앙 행정기관이면서 합의제 준사법기관이다.
공정위는 사업자들의 시장 지배력을 남용하는 문어발식 확장과 갑질 행위, 독과점 등 시장경제의 반칙 행위를 막는 창과 방패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다.
제주 출신 고병희 공정거래위원회 시장구조개선정책관(57)은 지난 9월 ‘공정위의 판사’라 불리는 상임위원에 올랐다.
공정위의 심판 결과는 법원 1심의 효력을 갖는다. 공정위 처분에 불복하면 사건이 2심인 서울고등법원에 배정되는 이유다.
▲민주화운동 접한 후 정외과 선택
고 상임위원은 1965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서 농사일을 하는 부모 밑에서 2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미초와 위미중학교, 제주제일고(27)를 졸업, 1985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최종 학력은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법학과 석사학위에 이어 중앙대 법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정치와 사회현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서울 서소문공원 인근에 있던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할 당시 연세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목격했다. 또한 그가 머물던 하숙집에는 연세대 정외과 학생들이 살고 있었다.
이 영향으로 정외과를 선택한 그는 단과대 학회(동아리)에서 사상과 철학을 토론하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동기들이 사법고시와 외무고시를 준비하자 그는 행정고시에 도전했다. 1993년 행정고시 37회에 합격, 이듬해 공직에 입문해 국무총리실 의전비서관실에서 근무했다.
그는 당시 이홍구·이수성 국무총리를 보필하며, 전 세계 국제축구연맹(FIFA) 위원들의 한국 방문 일정과 만찬을 담당했다. 이를 통해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에 일조했다고 밝혔다.
▲초대 공정위 유통정책관에 임명
1997년 공정위는 장관급 부처로 격상됐다. 전문성 있는 분야를 개척하고 싶었던 그는 기획재정부 대신 공정위 근무를 지원했다.
그는 2018년 공정위 초대 유통정책관에 임명됐다. 유통정책관은 대규모 유통·대리점법·가맹 등 이른바 ‘유통3법’을 관장하는 야전 사령관이다.
공정위는 당시 본사의 대리점 갑질 방지에 주력했다. 대리점주의 보호를 위해 본사의 보복 조치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했다.
이 배경에는 2013년 A유업에서 불거진 ‘물량 밀어내기’에서 비롯됐다.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 섞인 폭언을 한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고 위원은 당시 공정위 서울사무소 경쟁과장으로 사건을 조사했다. 그 결과 A유업은 7년 동안 대리점주에게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강매했고, 판촉사원 임금 전가 등 불공정행위로 최대 2000억원이 넘는 피해를 끼친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위는 A유업에 123억원의 과징금 부과와 대표이사를 검찰에 고발했다.
그는 유통정책관을 역임하면서 대리점 거래 불공정 관행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2015년 ‘대리점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대리점법)이 시행됐다.
▲대형마트 판촉비·인건비 전가 철퇴
2019년 ‘눈물의 삼겹살 데이’라는 기사가 화제가 됐다. B대형마트가 ‘삼겹살 데이’라는 대대적인 할인 행사를 벌였다.
유통업체는 돼지고기 1㎏당 1만4500원에 팔아야 본전을 뽑지만 해당 마트는 9100원에 납품하도록 했다.
2012년부터 3년여 동안 돼지고기 가격할인 행사에 납품된 돼지고기는 총 670억원으로 10% 할인 비용은 모두 유통업체가 떠안았다.
여기에 해당 마트는 행사기간 고기를 자르고 포장을 하는 등 2700여 명의 직원을 업체로부터 파견 받았고, 인건비도 떠넘겼다.
유통정책관이었던 그는 이 사건을 조사해 B대형마트에 유통업법 위반 혐의를 적용, 41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는 역대 최대의 과징금 부과, 갑질행위에 대해 철퇴를 내렸다.
고 위원은 “대형마트는 할인행사를 하면서도 이득을 봤지만, 그 이면에는 유통업체가 판촉비와 인건비까지 부담해 3년간 돼지고기를 반값에 납품해야 했다”며 “결국, 유통업체는 100억원의 적자를 보면서 부도가 났다. 대형마트는 소비자에게 싸게 판다고 하지만 착시 현상이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그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과 독거노인 보호에 앞장
2012년 ‘거마 대학생 사건’은 취업을 미끼로 사람 장사를 하면서 많은 취업준비생을 울렸다.
‘거마 대학생’은 서울 송파구 거여동과 마천동에서 합숙생활을 강요당하고 불법 다단계 영업을 한 피해 학생들을 일컫는 말로, 2만여 명의 피해 금액은 총 1000억원에 달했다.
당시 그는 공정위 특수거래과장이었다. 불법 다단계 회사들이 취업을 미끼로 취직을 시켜주겠다며 거짓말로 학생들을 유인했고, 합숙소와 찜질방에서 공동생활을 강요해 사회적 문제가 됐다.
이 회사는 다단계 판매원이 되기 위해서 6백만원 상당의 물품을 구입하고 사람을 데려오면 많은 돈을 벌수 있다고 세뇌교육을 했다.
그는 “저급한 물품을 대학생에게 강제로 할당하면서 대출까지 강요해 많은 학생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며 “소비자 피해주의보 발령에 이어 불법 다단계 피해 사례를 담은 홍보물을 전국 150개 대학교에 배부해 학생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조치했다”고 말했다.
고 위원이 특수거래과장으로 재임하던 2011년 상조회사에서 문제가 터졌다.
고 위원에 따르면 가난한 독거노인들이 자신의 장례를 대신 치러줄 상조회사에 매달 3만원을 납부했다.
이 돈은 대개 폐지를 줍고 마련했다. 그런데 일부 상조회사가 이 돈을 다른 데 투자해 빚더미에 올랐고, 신규 회원이 낸 돈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른바 ‘선불식 할부거래’의 피해가 발생했다.
고 위원은 상조회사가 매달 받는 선수금 예치비율은 50%까지 늘렸다. 즉, 회원이 매달 3만원을 입금하면, 이 중 절반인 1만5000원은 금융기관에 예치하도록 했다. 중도해약 시 돌려받을 수 있는 환급금도 최대 85%로 높였다.
그는 “상조회사가 해약 회원에게 환급을 해주지 않으면서 회원들은 죽어서야 환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불공정행위를 막기 위해 할부거래법을 손질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주 출신 중앙부처 공직자 모임인 제공회 회장을 맡고 있는 고 위원은 “각 부처에 있는 공직자들은 제주 발전과 국가 발전을 위해 성실히 일하고 있다”며 “선배들의 애향심을 이어받아 풍요로운 제주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말을 맺었다.
좌동철 기자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7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