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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만에 4.3 국가폭력 인정...보상 이뤄진다니 한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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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2022. 10. 2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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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만에 첫 보상을 결정받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몰라요. 이제라도 국가폭력이 인정돼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진다니 조금이나마 한이 풀립니다.”

4·3 희생자 국가보상금을 처음으로 받는 오인권씨가 4·3당시 무장경찰이 쏜 총에 맞은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제주4·3 희생자에 대한 첫 보상금 지급이 결정된 27일 오후 제주시 화북동에서 만난 오인권씨(76)는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팔을 연신 쓰다듬었다.

이 흉터는 73년 전 무장경찰대가 쏜 총에 맞아 생긴 것이다.

1949년 2월 1일 당시 생후 17개월의 갓난아이였던 오씨와 어머니(당시 25세)가 살던 집에 무장 경찰들이 쳐들어왔다.

경찰은 이들을 ‘빨갱이’라 부르며 성산일출봉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속칭 ‘터진목’으로 끌고 가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어머니는 총알을 맞아 숨졌지만 오씨는 팔과 가슴에 세 발의 총알을 맞고도 기적같이 살아남았다.

오씨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와 경찰에 희생당한 어머니를 잃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총을 맞아 성치 않은 몸과 불우한 가정환경에 굴곡진 삶을 살아야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바로 사회에 뛰어들어 화장품 판매업, 막노동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4·3의 아픔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살아가던 오씨는 2014년 4·3평화재단으로부터 “진뜨르 비행장(제주국제공항)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아버지 유해가 있는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씨는 한걸음에 달려가 유전자검사를 했고, 아버지가 맞다는 걸 확인하고는 곧장 아버지 유해를 어머니가 묻힌 가족 무덤에 안장했다.

오씨는 “평생을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유해를 찾고 나니 4·3 때 고통이 떠올라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아버지 유해를 찾은 뒤에도 4·3 진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오씨는 “하루도 그날의 아픔을 잊어본 적이 없다”며 “제주4·3이 세상 밖에 알려지기까지 나를 비롯해 많은 희생자들이 어렵게 보냈다”고 말했다.

오씨는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다. 다시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한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산하 보상심의분과위원회는 27일 오후 제주도청에서 회의를 열고 지난번 첫 심의에서 보류한 후유장애자 79명, 생존수형인 5명과 사망·행불자 220명 등 300명에 대한 보상금 지급 심의 절차를 진행했다.

 

원소정 기자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7533 

 

제주4·3 희생자 300명 첫 국가보상금 확정…11월부터 지급 - 제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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