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리 절부암…고씨부인이 목숨 끊은 절벽을 절부암으로 명명·글씨 새겨
당산봉 남쪽에 합장묘 있어…제전 마련해 행해지던 제사 성묘와 함께 지금까지 지내
▲지방기념물(제9호)로 지정된 용수리 ‘節婦岩(절부암)’
차귀도가 지척에 떠 있고 호화 요트도 오가는 용수리 바닷가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용수포구 맞은편에 조성된 소공원의 자연석에 새겨진 ‘節婦岩’이란 글자를 감상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바닷가 절벽에 전서체로 또렷하게 새겨진 節婦岩이란 마애명은 남편을 따라 순절한 제주고씨를 기리는 기념물이다.
소공원 절벽에는 또한 당시의 제주판관 신재우가 제명(題名)하고, 김응하가 글을 쓰고, 이팔근이 조각하였다는 마애명도 있다.
절부암 마애명의 주인공 제주고씨는 1835년 한경면 저지리에서 태어나 용수리에 사는 어부 강사철과 1853년 결혼하였다. 하지만 결혼한 그해 겨울 고씨남편이 동승하고 바다로 간 배는 불행하게도 돌아오질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 다음 날 해안가에 떠오른 시신에는 고씨남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3일 밤낮으로 바닷가를 헤맸으나 남편을 찾지 못한 부인은 섣달 보름날 소복으로 단장하곤 ‘엉덕동산’ 후박나무에 목매 죽으니, 방년 19세였다.
그러자 하늘의 부름처럼 아내가 목매 숨진 바닷가에 이내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이 애절한 사연을 지켜본 동네 사람들은 후손 없이 생을 마감한 가련한 부부를 정성껏 장사 지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1867년 제주판관 신재우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조정에 알리는 한편, 고씨부인이 목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명명하고 마애명을 한자로 새기게 했다.
또한, 당산봉 남쪽에 위치한 고씨부부 합장묘에 비석도 세우고 제전(祭田)도 마련하여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절부고씨와 제주판관 신재우와의 전설 같은 만남
절부고씨 부부의 합장묘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다. 비석에 새긴 이 글은 제주판관 신재우가 1867년 직접 작성한 문장이다.
“… 남편이 대나무를 베러 차귀도에 갔다가 바다에서 죽었으나 시신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씨는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 울부짖으며 파도를 따라 다녔으나 허사였다. 음식을 끊은 고씨가 보름날 밤 바닷가 나무에 목을 매니 3일 후 남편의 시신이 떠올랐다. 이는 참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일이다. … 사안이 중대하여 정문(旌門)을 요청하였다.…이에 찬사를 비에 새겨 그윽한 절개를 기리려 한다.”
청년 신재우는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지내던 어느 해에 소복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꿈을 꾼다. 묘한 꿈에 대한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지인에게 문의한 신재우는 ‘애절하게 죽은 여인을 잘 모시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라는 알 듯 말 듯 한 말을 듣는다.
마침 열녀에 관한 서책을 읽다 문뜩 절부고씨를 떠올린 신재우는 고씨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낸다. 그런 정성에 감응했는지 과거에 합격한 신재우는 제주판관으로 영전하는 길에 들린 진도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날 밤 또 그 여인이 꿈에 나타나서는 ‘첫닭이 울거든 곧 떠나라.’라는 말을 전한다. 꿈속 계시를 받은 신재우는 서둘러 배에 오르니 제주목 산지포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진도에서 늦게 출항한 배가 폭풍으로 침몰하였다는 비보를 접한다.
이에 감응한 신재우는 죽음에서 구해준 여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절부암 제명(題名)과 절부고씨 표절비(부부합장묘비)는 물론, 대정현감과 대정군수 재직 시에는 고씨부부의 묘제를 지내도록 지원한다.
용수리에서 행해지던 이 묘제(열녀제)는 1944년부터 중단되었다가 1947년 이후 용수리 부녀회에서 성묘와 함께 지금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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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따라 이승 등진 열아홉 여인의 절절한 이야기 - 제주일보
▲지방기념물(제9호)로 지정된 용수리 ‘節婦岩(절부암)’차귀도가 지척에 떠 있고 호화 요트도 오가는 용수리 바닷가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용수포구 맞은편에 조성된 소공원의 자연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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